곁에 이미 살고 있는,

묵티를 발견하는 힘

정주민-먼저 온 이주민-나중에 온 이주민

시따, 기따, 람, 라원, 은옥, 홍석. 이들의 이름은 애매하다. 베트남의 '응옥(Ngọc)'이 한국식 이름 '은옥’이 된 것처럼 지구 남쪽 라마야나 1) 대서사시 속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여러 언어를 거치며 적당히 변형되었다. 도망 다니는 신세 홍석도 본명일 리 없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이들은 큰 고통을 등에 짊어지고 국경을 넘었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 물이 고이고 발이 빠져드는 진흙 위에서라도 정착을 해보겠다고 생사를 걸고 악전고투 중이라는 것.

사람들은 이들을 통칭하여 이주민이라 부른다.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2), ‘있지만 없는’3), 살아서는 ‘미등록’(Undocumented), 죽을 땐 ‘사인 미상’(Unknown), 죽고 나면 ‘무연고’(Unrelated)4) 라는 수식어도 자주 붙는다. 국호와 같은 우익 자경단 사람들은 이들에게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 말하며 위협한다.

이들이 ‘사장님’이라 부르는 택주와 복주도, 마을 사람들이 내놓지 않는 빈집만 바라보며 부동산 문을 열고 있는 정희도 사실 삶의 막판까지 가 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더 깊이, 더 멀리 연근 밭까지 오느라 도-읍-면-리 행정 경계선을 넘었고, 갚아도 갚아도 끝없는 대출 한도선에 위태로움을 느낀다. 결국 곧 소멸할 것만 같은 이 마을에 안전하게 안착한 정주(定住)민이라기 보다는 먼저 도착한 불안한 이주민일 뿐이다.

어쩌면 유일하게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이는 고령의 위례뿐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삶도 위태롭다. 아들도, 손자도, 생과 사의 경계선을 먼저 넘어갔다. 유일하게 남은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도 이제 그녀를 떠날 태세다.

결국 누구 하나 성한 이 없는 연근 밭. 진흙처럼 미궁으로 빠져드는 삶, 도무지 ‘살만하지 않은 삶’5) 속의 이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연극은 한 번도 ‘인간인 적 없었던’ 이들로부터 그 생존의 지혜를 구해보는 경청의 연극이다.

“‘인간’은 결코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용어가 아닙니다.”6)

“결국 인간처럼도 살지 못해.”(묵티), “너처럼? 인간답게?”(라원),

“새로운 이들을 경계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야.”(홍석),

“가자, 인간들이 사는 집으로.”(시따),

인간, 인간, 인간...이주민들은 이 ‘인간’이라는 단어를 매우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람의 대사를 잠시 인용해 보자면, 아,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다. 이유는 백인, 남성, 시민, 정착민, 합법적인 주체 등으로 상정되어 온 서구 중심 ‘인간’ 개념이 이주민들을 끊임없이 ‘국가 밖 사람’, ‘불안정한 존재’, ‘불법적 존재’인 ‘비(非)인간’의 자리로 내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주민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자 한다면, 다른 언어, 신체, 역사, 환경 속에서 형성된 존재인 이들이야말로 근대 서구의 ‘고정된 개인으로서의 인간’, ‘보편적 인간’의 개념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존재, 다른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들이다. ****즉 이주민들은 기존 서구 근대적 세계관의 인간 범주에 억지로 포함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철학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말한다. 국적, 시민권, 정주 등 ‘어디에 속하는가’를 넘어서, 인간이란 대체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인간답게 살아. 인간들이랑 어울려. 그렇다고

네가 가진 그 아름다운 옷을 벗으라는 건 아니야.”(묵티)